[칼럼] 투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투표할 수 없었다
2026.06.30

소소한소통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바쁜 시간을 보냅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선거 정보를 만들기 때문이죠. 한창 지방선거 준비로 바쁘던 지난달,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선거철이라서 바쁘겠구나.” 입후보한 것도 아닌데 소소가 선거 때마다 바쁜 이유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발달장애인이 오롯이 자신의 선택으로 투표에 참여하게 되기를 바라지만 몇몇 후보의 공보물을 쉽게 바꾸고 고작 10개의 공약을 쉽게 바꾸는 것만으로는 그런 변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올해도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발달장애인들을 만나고, 지방선거를 마친 뒤에 밀려온 생각을 이번 칼럼에 담았습니다. 해가 갈수록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선명해지고, 제도 개선의 방향은 또렷해집니다. 모쪼록 다음 선거에서는 소소가 만든 쉬운정보와 달라진 제도를 통해 투표했다는 후기를 들려주는 발달장애인을 만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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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투표할 수 없었다


백정연(소소한소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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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를 며칠 앞두고 한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들과 선거공약을 함께 살펴보는 교육을 진행했다. 후보자의 공약에 담긴 어려운 표현을 찾아보고 어떤 뜻인지, 후보자가 말하는 정책이 실제로 어떤 내용인지 쉽게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교육에 참여한 발달장애인들은 공약을 읽는 내내 “어렵다”는 말과 함께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낯선 정책 용어가 많았고, 한자어 중심의 짧은 개조식 문장은 정말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몇 줄 되지 않는 공약 안에 너무 많은 정보가 압축되어 있었고, 그 정보가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짐작하기 어려워했다.

그래도 교육이 끝날 무렵에는 다들 투표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공약이 어렵기는 하지만 후보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투표가 자신의 권리라는 사실도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에 기대했고, 다들 자신의 한 표를 제대로 행사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다음 주, 다시 만난 네 명의 발달장애인은 모두 투표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어려워서요.”, “뭘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누구를 뽑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유를 들어보니 투표를 하기 싫었던 것이 아니었고, 정치에 무관심했던 것도 아니었다. 투표를 하겠다 말했지만 막상 선거일이 다가오자, 후보자를 이해하는 것도, 투표소에 가는 것도, 투표용지를 받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두 어렵게 낯설게 느껴진 것이다. 결국 아무도 투표소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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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소소한소통이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숙제 같은,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을 이번 칼럼에서 한 번 더 다루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투표소에 접근할 수 있고, 투표용지를 받을 수 있으면 권리 보장의 기본 요건이 충족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투표는 투표소에서 갑자기 시작되는 행위가 아니다. 후보자가 누구인지 알고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 공약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보는 것,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에서 투표는 시작된다. 투표소 안에서 도장을 찍는 순간은 잠깐이지만, 그 한표가 자기결정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긴 정보 접근과 이해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은 이 지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발달장애인에게 투표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선거 정보는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제공된다. 선거 공보물은 개조식의 한자어 중심으로 된 글로 이루어져 공약은 정책 담당자나 전문가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쓰인다. 한자어와 행정용어, 추상적인 가치 표현이 이어지고, 각 후보자의 차이를 비교하기도 쉽지 않다. 토론회는 후보자들의 말이 빠르거나, 겹처서 진행되고 뉴스는 배경지식을 전제로 설명한다. 선거 때마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한 표를 어떻게 판단하고 행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는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

 


결국 많은 발달장애인은 가족이나 활동지원사, 복지시설 종사자 등 주변 사람의 설명에 의존하게 된다. 물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누구나 선거 때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고, 추천을 듣고, 영향을 받는다. 문제는 발달장애인의 선택에 근거가 되는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고 있지 않아, 도움과 대리 판단의 경계가 쉽게 흐려진다는 데 있다. ​ 

 

 

 

 

"참정권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시민만이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다."

 

 

사회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말하는 걸 넘어 강조한다. 자립생활을 이야기하고, 지역사회 참여를 이야기하고, 당사자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인 선거 앞에서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 발달장애인이 후보자를 선택하면 “정말 알고 뽑은 걸까?”라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비장애인의 투표에는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비장애인도 가족의 영향을 받아 투표하고, 익숙한 정당을 보고 투표하고, 후보자의 이미지나 뉴스 보도를 보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투표를 유효한 시민의 선택으로 인정한다. 유독 발달장애인에게만 높은 수준의 이해와 더 완벽한 판단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


참정권은 완벽하게 합리적인 시민만이 행사하는 권리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이 각자의 조건과 경험 안에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은 ‘그들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사회는 무엇을 제공했는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어려운 정보를 그대로 둔 채 “왜 투표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이해할 수 있는 정보도, 안정적인 지원도, 충분한 연습 기회도 제공하지 않은 채 투표하지 못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최근 발달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는 청와대 앞에서 참정권 보장을 요구*했다. 당사자 단체들은 10년 넘게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 그림투표용지, 공적 투표보조인, 모의투표 전국 실시 등을 이야기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어온, 너무 오래 미뤄진 숙제 같은 바람이다. 그 사이 발달장애인은 매번 낯선 공약 앞에서, 복잡한 투표용지 앞에서, 제각각인 투표소 현장 대응 앞에서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투표보조의 문제는 발달장애인 참정권의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은 신체장애 등으로 혼자 기표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투표보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제도는 주로 시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을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인지적 어려움으로 지원이 필요한 발달장애인은 현장에서 투표보조를 거부당하는 일이 반복됐다.

 

투표보조인은 대신 투표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투표 과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필요한 설명과 지원을 제공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여전히 발달장애인이 투표보조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두고 투표소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되곤 한다. 어떤 곳에서는 허용되고, 어떤 곳에서는 거부된다. 권리 보장이 현장 담당자의 이해와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면, 그것은 권리라고 부르기 어렵다. 권리는 어느 투표소에 가느냐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 발달장애인의 경우, 평소 신뢰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이나 활동지원사 등 1인과 기표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객관적인 지원을 담당하는 투표사무원 1인이 함께한다면,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면서도 공정한 선거 원칙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

 


또한
법원은 이미 발달장애인의 투표보조 권리를 인정하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발달장애로 인해 기표에 어려움이 있는 유권자도 투표보조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하며, 발달장애인을 위한 투표 보조용구 제공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판결도 있었다. 그럼에도 제도는 여전히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판결에 불복하거나,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행정적 변화가 미뤄지는 동안, 발달장애인 유권자는 또 한 번의 선거를 어렵게 통과하거나 아예 포기한다. 투표하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결국 투표하지 못하는 일, 투표소 앞에서 되돌아가는 일, 누군가의 설명 없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멈춰서는 일은 곧 권리 침해다.

그림투표용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은 후보자의 얼굴, 정당 로고 등 시각적 단서가 투표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 후보를 구별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그림과 상징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하려는 후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실수 없이 기표하기 위한 중요한 정보다. 물론 후보자 사진을 투표용지에 넎는 문제에는 선거 행정상의 쟁점과 사회적 논의가 필요할 수 있다. 사진이 후보자의 외모에 따른 편향을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런 우려가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결론으로 가서는 안 된다. 사진이 어렵다면 정당 로고와 상징색을 병기하는 방식부터 시범적으로 도입할 수 있다. 투표용지 전체를 바꾸기 어렵다면, 투표용지를 끼워 사용하는 보조용구를 제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불가능한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방법을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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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사례를 보면, 발달장애인의 선거 참여를 돕는 제도는 이미 존재한다. 영국에서는 정당들이 읽기 쉬운 공약집을 별도로 제작하고, 발달장애인 유권자를 위한 선거 정보 제공 캠페인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맨캡(Mencap)은 각 정당에게 쉬운 공약을 요구하고, 제출한 공약은 웹사이트에 모아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을 보조하고 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쉬운 유권자 가이드북을 공공 재정으로 제작해 도서관, 학교, 복지기관 등에 배포해왔다. 스웨덴은 이해하기 쉬운 뉴스와 공공정보 제공 체계를 통해 선거 시기에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정보 접근을 보장한다. 또 스코틀랜드에서는 투표용지에 정당 로고를 병기하고, 대만은 투표 용지에 후보자의 사진을, 파키스탄은 각 후보가 소속된 정당 로고를 투표 용지에 넣어 유권자들의 참정권 행사를 도왔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3분의 1이 문맹인 케냐는 개헌안 투표 용지에 찬성은 바나나, 반대는 오렌지에 기표하도록 그림투표용지를 만들었다.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선거 정보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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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멘캡(Mencap) 홈페이지

 

이러한 제도는 발달장애인에게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쉬운 선거 정보는 고령자, 이주민, 낮은 문해력을 가진 사람, 선거가 처음인 청년, 정치가 낯선 시민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소소한소통이 최근 대통령선거에서 만든 쉬운 10대 공약 사이트에는 많은 청소년들이 방문하여 쉬운 선거 공약을 응원한 바 있다. 복잡한 선거 정보를 더 명확하게 정리하는 일은 민주주의의 수준을 낮추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높이는 일이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된 정책이야말로 더 많은 시민의 검증을 받을 수 있다. 쉬운정보는 정치를 단순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은 몇 가지 편의 제공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조를 다시 점검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상정하는 ‘표준 유권자’는 누구인가. 긴 글을 읽고, 복잡한 제도를 이해하고, 낯선 공간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투표 절차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만이 유권자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발달장애인도 시민이고, 유권자이며, 정책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다. 복지 정책, 노동 정책, 주거 정책, 교육 정책, 지역사회 서비스 정책은 발달장애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그 정책을 결정할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 발달장애인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결함이다.

제도 개선의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이 제도적으로 의무화되어야 한다. 정당이나 후보자의 선의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일반 공보물이 발송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공보물이 발송되는 것처럼, 쉬운 선거공보물도 공식 선거 정보의 일부로 제공되어야 한다. 둘째, 그림투표용지나 정당 로고 병기, 또는 그림투표보조용구 등 시각적 정보를 활용한 투표 지원 방식을 시범 도입하고 확대해야 한다. 셋째, 발달장애인을 포함해 인지적 지원이 필요한 유권자의 투표보조 권리가 명확히 보장되어야 한다. 투표소마다 다른 기준이 적용되지 않도록 법과 매뉴얼에 분명히 명시하고, 현장 인력 교육도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선거 직전 일회성 안내가 아니라 모의투표, 쉬운 선거 교육, 상시적인 정치 정보 접근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참정권은 투표소에서 도장을 찍는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며칠 전 교육에서 만났던 네 명의 발달장애인을 다시 떠올려본다.그들은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라, 투표할 수 있는 조건을 충분히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권리 의식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정보, 충분한 시간, 안정적인 지원, 실수해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선거가 끝나면 투표율을 말한다. 몇 명이 투표했는지, 어느 세대가 더 많이 참여했는지, 어느 지역의 참여가 높았는지 분석한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질문도 해야 한다. ‘투표하지 못한 사람들은 왜 투표하지 못했는가’, ‘투표한 사람들은 정말 자신의 의사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는가’, ‘선거 정보는 누구에게나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제공되었는가’, ‘투표소는 모든 시민에게 같은 정도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공간이었는가’와 같은 질문을 말이다.

참정권은 투표소에서 도장을 찍는 순간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후보를 알 수 있을 때, 공약을 이해할 수 있을 때,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 사진의 선택을 의심받지 않을 때 비로소 참정권은 현실이 된다.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이제는 발달장애인이 “누구를 뽑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 채 선거를 지나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대신 정해준 후보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선택한 후보에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려워서 못 했다”는 말이 다음 선거에서도 반복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의 실패다. 참정권은 단순히 투표용지를 받아들고 도장을 찍는 행위가 아니다. 나의 한표를 어떻게 행사할지, 후보자들을 비교해서 살펴보고, 이해하고, 선택할 권리다. 그리고 그 권리는 발달장애인에게도 온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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