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누구를 뽑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2025.06.30

선거철, 뉴스를 보면 백발의 어르신도 투표소에 나오는 모습이 보도되기도 합니다. '최고령 유권자, 아무개 어르신의 소중한 한 표 행사', 이런 제목이 붙은 기사를 한 번쯤은 보셨을 것 같아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투표에 참여하셨을 그분은, 자신이 투표한 모든 후보를 기억하고 계시려나요.

반대로 선거가 치러지는 해의 몇 월 몇 일 이전 출생자부터 투표가 가능하다며 첫 투표를 하게 될 청소년을 인터뷰한 리포트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첫 투표는 평생 기억에 남겠지요. 최고령 유권자 어르신도 첫 투표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방 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를 몇 번인가 거쳤지만 정작 투표한 사람이 당선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게 민주주의일 테지요. 지난 선거에서 누구를 뽑았는지 일일이 기억하기란 어려운 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이유로 누구를 뽑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투표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정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드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유권자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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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뽑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백정연(소소한소통 대표)

 


투표권을 갖고 처음 투표를 하게 되던 때, 아빠는 나에게 여러 차례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하라셨다. 이유 불문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무조건 뽑아야 한다는 식의 강요는 아니었다. ‘너는 아직 어려 정치를 잘 모르니, 아빠가 도와줄게’라는 일종의 ‘선거 지원’에 가까웠지만 나는 고맙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정치는 잘 몰라도, 후보자의 공약을 이해하고 선호하는 공약을 보고 투표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경험을 봤을 때, 후보자의 공약을 이해할 수 있다면 나의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은 얼마든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유권자가 나와 같은 것은 아니다. 공약을 이해하는 일은 나의 한 표를 내 것으로 행사하기 위한 아주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지만,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발달장애인이다.

얼마 전 우리는, 예정보다 이른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갑자기 당겨진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느라 여러 사람의 마음이 복잡하고 분주했겠지만, 발달장애인 유권자도 그러했다. 계엄부터 대통령 탄핵까지 일련의 사건도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번 선거도 이전 선거와 마찬가지로, 발달장애인의 손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공보물’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는, 국민의 책임감이 더해진 선거에서 발달장애인은 이번에도 그렇게 공약을 이해하지 못한 채 투표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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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대통령선거 쉬운 10대 공약> 홈페이지

 

 

 

그래서 소소한소통은, 지난 대통령 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챙기지 않는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우리라도 챙기자’라는 쉬운 정보 제작 전문 사회적기업으로서의 사명감으로 <쉬운 10대 공약>을 만들었다. 후보자의 10대 공약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웹사이트에 공개되고, 사전 투표일까지 불과 2주의 시간밖에 없었다. 쉬운 글 라이터 9명이 초안 작성부터 수정, 최종 검토까지 바쁘게 움직였고, 쉬운 정보로서의 완성도를 높이고 높이려다 보니 자정을 넘겨 퇴근한 날도 있었다.

결과물은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후보자의 공약을 쉽게 바꾸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력이 생각보다 많이 투입된다. 공약을 쉽게 바꾸기 위해서는 공약의 정확한 의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공약은 한자어 중심의 짧은 개조식 문장으로 되어 있어 공약만 보고 의미를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보자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후보자의 인터뷰 기사나 토론 방송 등을 찾으며, 작업자가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을 만들어간다. 이번 <쉬운 10대 공약>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발달장애인 당사자는 오래전부터 그림 투표용지와 쉬운 공보물을 권리로써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 되려면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야 한다. 다행히도 국회가 새로 구성될 때마다 이에 공감하는 국회의원이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 중이나, 안타깝게도 매번 통과되지 못하고 계류 중이다.

2022년 2월에 작성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의 검토보고서에는 ‘이해하기 쉬운’이라는 표현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발달장애인법 시행령 제4조 제2항에서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 정보의 기준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한다고 규정했음에도, 보건복지부가 그 기준을 정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쉬운 정보에 대한 국가 차원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의 중요한 권리인 ‘참정권’이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발달장애인법 제10조 관련 법률 구조>

법률

시행령

시행규칙

제10조(의사소통지원) 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령과 각종 복지지원 등 중요한 정책정보를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하여 배포하여야 한다.

<중략>

④ 제1항부터 제3항까지에 따른 정책정보의 작성 및 배포, 의사소통도구의 개발ㆍ교육 및 전문인력 양성, 민원담당 직원에 대한 의사소통 지침 개발 및 교육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4조(정책정보의 작성 및 배포) 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법 제10조제1항에 따라 작성하고 배포하여야 하는 중요한 정책정보에 다음 각 호의 사항을 포함시켜야 한다.

1.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령으로서 보건복지부장관이 정하는 법령에 관한 사항

2. 발달장애인에 대한 보육, 교육, 고용, 의료, 문화, 예술, 여가, 체육, 소득보장 및 주거 복지지원 등에 관한 정책정보로서 보건복지부장관이 정하는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정보에 관한 사항

②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제1항에 따른 정책정보를 작성하는 경우에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여 보건복지부장관이 정하는 기준에 따라 작성하여야 한다.

③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여 서면 또는 전자적 방식 등으로 정책정보를 배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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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에 주목하여, 2022년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 때 발달장애인의 정책 선거를 돕는 쉬운 정보를 만든 바 있다. 발달장애인에게 정책 선거가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알리고 정책 선거를 돕는 일종의 참고서 같은 것이었다. 많은 발달장애인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소소한소통이 많은 자료가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만, 발달장애인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공보물 자체가 쉬워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법에서 유일하게 쉬운 정보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발달장애인법이 단단해지는 것이 선결되어야 하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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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대통령선거 쉬운 10대 공약> 홈페이지

 

  

우리 사회는 발달장애인의 자기결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발달장애인이 바른 자기결정을 하는지 의심한다. 비장애인이라고 모두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유독 발달장애인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이는 ‘발달장애를 가졌으니 제대로 된 판단은 어려울 거다.’라는 선입견과 편견이 투영된 결과라 생각한다. 똑같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것도, 사회가 발달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발달장애인의 선거 경험을 묻는 인터뷰에서 발달장애인의 목소리는 하나같이 “어렵다”로 귀결되었다. 선거 토론 방송은 질문과 답변이 빠르게 오가다 보니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차치하고 흐름 자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어쩌다 한 번 하는 선거마다 바뀌는 후보들이 누구인지 알기 어려웠고, 공약을 이해하기 어려우니 악수해본 사람, 뉴스에 많이 나온 사람 등 익숙한 사람을 뽑는다고 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발달장애인의 이야기는 누구를 뽑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부모님이 강요하는 후보자를 뽑고 싶지 않아, 그 사람이 아닌 ‘아무나’의 이름 옆에 도장을 찍어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성인이 되면 누구나 투표를 한다. 투표는 국민이 가진 권리이자, 의무다. 발달장애인도 국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 발달장애인이 공약이 어려워서, 강요받는 것이 싫어 ‘아무나’ 뽑는 투표를 하지 않을 권리, 이제는 국가가 지켜줘야 할 때다.

*본 칼럼은 2023년 1월 국회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권리 보장을 위한 이해하기 쉬운 정보자료 마련 토론회>의 토론문 중 일부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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