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쉬운 정보 감수, 발달장애인의 참여가 형식이 되지 않으려면
2025.12.29

소소한소통에서는 쉬운 정보를 만들 때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감수를 받습니다. 하지만 감수는 단순히 발달장애인 당사자에게 ‘어렵지 않나요? 이해되었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감수원으로 일하는 발달장애인이, 또 감수라는 직무를 제공하는 일터에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17670032341767003234005_2025%2B12%2B%25EB%2589%25B4%25EC%258A%25A4%25EB%25A0%2588%25ED%2584%25B0.png

 

 

 





쉬운 정보 감수,

발달장애인의 참여가 형식이 되지 않으려면

​

백정연(소소한소통 대표)

 

 

내년 장애인일자리 직무에 ‘읽기 쉬운 자료 감수원’이 새롭게 생겼다. 정부가 공식적인 일자리로 ‘쉬운 정보 감수’를 만들었다는 점은, 쉬운 정보의 필요성에 대한 정책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자체로는 분명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기쁨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쉬운 정보를 만드는 시장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현재 국내에서 쉬운 정보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기업은 소소한소통과 피치마켓, 단 두 곳뿐이다. 양과 질, 모든 측면에서 쉬운 정보의 생산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발달장애인이 ‘쉬운 정보 감수’를 하는 일이 정부 일자리로 먼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반가움보다 우려를 앞서게 했다.

 

물론 정부의 정책과 서비스는 늘 합리적인 순서로만 생겨나지 않는다. 때로는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절차 속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을 무조건 비판하기보다, 쉬운 정보 제작 전문기관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어쩌면 이 칼럼이 그 질문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감수는 왜 전문성을 요구하는가



감수는 단순히 발달장애인에게 “이거 이해되세요?”라고 묻고 답을 듣는 자리가 아니다. 실제로는 감수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감수 회의를 운영하는 비장애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감수가 언뜻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대화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판단과 해석, 결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감수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첫째, 감수를 운영하는 사람은 쉬운 정보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인에게 쉬운 정보가 왜 필요한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는 정보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감수는 쉽게 방향을 잃는다. 감수 과정에서 쏟아지는 다양한 의견 중 무엇을 결과물에 반영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그 기준점이 바로 쉬운 정보에 대한 이해이자 전문성이다.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이 개인적인 선호인지, 아니면 이해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의견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쉬운 정보에 대한 높은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둘째, 발달장애인과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발달장애인이 자신의 생각을 말로 꺼낼 때까지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하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망설임이나 혼란을 표정과 반응을 통해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해했어요.”라는 대답 뒤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다시 묻는 질문 기술도 필요하다.

 

셋째, 감수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축적할 수 있어야 한다. 감수에서 나온 의견은 그 자료 하나로 끝나는 피드백이 아니다. ‘발달장애인은 이런 표현을 어려워한다.’, ‘이런 구조로 설명하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와 같은 패턴은 이후 쉬운 정보를 만들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감수 운영자는 이 패턴을 발견하고 기록하며, 쉬운 정보의 기준을 조금씩 축적해 나가는 사람이다.

 

17670035281767003528701_%25EC%2595%2584%25ED%258A%25B8%25EB%25B3%25B4%25EB%2593%259C%2B%25E2%2580%2593%2B4.png
 



 

훈련되지 않은 감수의 위험​

 

 

이러한 준비와 맥락 없이 진행되는 감수는 쉽게 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한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했다’라는 말 뒤에 실제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정보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여전히 어려운 정보가 존재한다면 쉽지 않은 쉬운 정보, 다시 말해 실패한 쉬운 정보다. 문제는 이러한 실패의 책임이 당사자에게 전가될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정보가 여전히 어렵다면 그 원인은 제작 과정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감수를 했다는 사실이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는 면죄부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쉬운 정보를 만들 책임을 감수자에게 떠넘기는 구조다.

 

감수는 발달장애인이 참여했다는 증거 이상이어야 한다. 쉬운 정보 제작자의 전문성과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경험 전문성이 함께 작동하는 지점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달장애인 당사자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과물을 정당화하는 ‘확인 도장’으로 소비되고 만다.

​ 

 

 

감수하는 발달장애인에게 필요한 조건​ 

 

그렇다면, 감수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에게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훈련이나 교육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첫째,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해되지 않는데 “이해됐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 모르는 단어를 아는 척 하지 않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다’, ‘모르겠다’라는 피드백을 불편해하거나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에, 솔직함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태도는 아닐 수 있다.

 

둘째, 한자어 등 어려운 표현을 기계적으로 찾지 않아야 한다. 한자어, 전문용어, 외래어를 할 일 목록처럼 찾아내는 일은 비장애인도 할 수 있다. 감수자의 역할은 ‘어떤 단어가 왜 어려운지’, ‘어디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관점에서 어렵게 느껴지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회의라는 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하거나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감수는 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회의 형태로 진행된다. 질문을 듣고, 생각할 시간을 갖고, 자신의 차례에 말하는 경험이 반복된다. 약속 시간을 지키고, 회의에 집중하는 등 기본적인 회의 매너 역시 경험을 통해 익혀갈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쉬운 정보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어야 한다. 쉬운 정보가 발달장애인에게 왜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한 공감이 없는 경우, 감수 과정에 집중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 일이 왜 중요한지, 자신의 말이 결과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에 공감할 때 감수의 밀도는 달라진다. 자신이 하는 일의 무게를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할 때 더 깊은 의견이 나온다.

 

다행히 이 모든 조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감수자에게 단번에 ‘완성된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감수 회의를 어떻게 설계하고, 어떤 분위기로 운영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감수자의 성장 역시, 감수를 운영하는 사람의 역량과 책임에 달려 있다.

 

17670036831767003683766_%25EC%2595%2584%25ED%258A%25B8%25EB%25B3%25B4%25EB%2593%259C%2B%25E2%2580%2593%2B5.png 

당장 내년 1월부터 현장에서 ‘읽기 쉬운 자료 감수원’으로 일하게 될 발달장애인을 떠올리면, 걱정을 쉽게 놓을 수 없다. 감수용으로 제공되는 자료가 제대로 만들어진 쉬운 정보가 아니라면, 발달장애인 당사자는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이는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일의 구조와 준비의 문제다.

 

또한 쉬운 정보가 무엇인지, 왜 발달장애인에게 중요한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없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되다면 혼란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자신이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지, 어떤 의견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 채 ‘감수’라는 이름의 일을 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 그 과정에서 감수는 노동이 아니라 부담이 되고, 전문성은 발휘되기는커녕 위축될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이 일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점검과 준비다. 발달장애인이 경험 전문가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으려면, 일자리 수행기관 직무 담당자부터 쉬운 정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감수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감수자의 역할인지, 무엇이 제작자의 책임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감수는 확인 절차가 아니라 협업의 과정이며, 발달장애인은 형식적인 참여자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동료다. 이 기본적인 인식 없이 만들어진 감수 일자리는, 결국 누구에게도 좋은 일자리가 되기 어렵다.

쉬운 정보 감수의 전문성은 감수자 개인에게서만 나오지 않는다. 그 전문성은 감수를 설계하는 구조, 감수를 운영하는 사람, 그리고 발달장애인의 경험이 존중받는 환경 속에서 함께 만들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감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해야 한다.

 

  

 

 

 

 

칼럼은 소소한소통 블로그에서도 동시 연재됩니다.
편하신 환경에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 소소한소통 블로그 바로가기(클릭) 

 

 ​